맨위로가기

양진 (후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양진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어려서부터 경학에 밝아 관서의 공자로 칭송받았다. 50세에 관직에 나아가 형주자사, 동래태수를 거쳐 태복, 태상, 사도, 태위를 역임했다. 청렴함을 잃지 않고 간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특히 환관들의 횡포와 안제의 측근들을 견제하려 했다. 결국 모함을 받아 태위에서 면직된 후 자결했다. 그의 가문은 '사세태위'로 불리며 명문으로 칭송받았으며,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이 양진을 시조로 칭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홍농 양씨 - 양귀비 (당나라)
    양귀비는 당 현종의 황귀비로서 뛰어난 미모와 재능으로 총애를 받았으나, 친족의 권력 남용과 안사의 난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이며, 그녀의 삶은 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홍농 양씨 - 무원황후
    무원황후 양염은 서진 무제의 황후로, 총명하고 아름다워 사마염과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으며, 태자 옹립에 기여했지만 질투심으로 후궁 선발에 영향을 주고 가남풍을 태자비로 추천하여 서진 멸망에 간접적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후한의 사도 - 왕윤
    왕윤은 후한 말 관료로서 동탁 암살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황건적의 난 진압에도 공을 세웠으나, 동탁 제거 후 잔당의 반란으로 헌제를 지키다 가족과 함께 죽임을 당한, 뛰어난 능력과 충절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 후한의 사도 - 성윤
    성윤은 후한 시대의 관료로,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에 제수된 후 의랑, 대홍려, 사공, 사도를 역임했으나 면직되었고 연희 연간에 사망했다.
  • 후한의 태위 - 동탁
    동탁은 후한 말 군벌로, 폭정과 권력 찬탈을 시도했으며,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하여 상국에 올랐으나 여포에게 암살당했으며, 독재와 폭정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 후한의 태위 - 가후
    가후는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전략가로, 여러 군주를 섬기며 뛰어난 책략과 통찰력으로 활약하여 위나라 건국에 공헌했고 사후 숙후에 추증되었다.
양진 (후한)
기본 정보
양진의 초상화
양진의 초상화
양(楊)
진(震)
백기(伯起)
시호문(文)
출생기원전 54년
사망124년
출생지홍농 화음(弘農華陰)
사인병사
묘소섬서성 화음시(陝西省華陰市)
관직
주요 관직형주자사(荊州刺史)
동래태수(東萊太守)
탁군태수(涿郡太守)
사도(司徒)
태위(太尉)
가계
부친양보(楊寶)
손자양표(楊彪)
증손양수(楊修)
기타
시대후한
활동 시기안제 시기
관련 인물왕밀(王密)
조포(趙苞)
등홍(鄧弘)

2. 생애

양진은 후한 시기의 인물로,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관서공자(關西孔子)'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 형주자사, 탁군태수, 사도, 태위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원초 4년(117년), 태복이 되었고, 이후 태상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유학자 인재가 부족했기에 양륜 등을 추천하여 박사(博士)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영녕 원년(120년), 사도가 되었다. 영녕 2년(121년), 등수 태후가 사망하고 안제의 친정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안제의 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했다. 안제의 유모 왕성의 딸 백영이 궁중에서 부정을 저지르자, 양진은 안제에게 간신을 제거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안제는 양진의 상소문을 측근들에게 보여주었고, 이로 인해 양진은 원망을 사게 되었다.

연광 2년(123년), 태위가 되었다. 대홍려 경보는 양진에게 중상시 이윤의 형을 임용하도록 권했지만, 양진은 이를 거절했다. 집금오 염현 또한 연줄을 통해 인재 발탁을 요청했지만, 양진은 이 역시 거절했다. 사공 유수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이윤의 형과 염현의 연줄을 임용하면서, 양진은 더욱 많은 원망을 사게 되었다.

안제가 왕성의 모친을 위해 저택을 짓고, 환관 중상시 번풍 등이 권력을 휘두르는 등 안제 측근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양진은 여러 차례 강하게 안제를 비판했고, 안제 또한 양진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연광 3년(124년), 안제가 동쪽으로 순행을 떠난 사이, 번풍 등은 조서를 위조하여 저택을 크게 증축했다. 양진의 연인(戀人) 고서가 이를 간파하고 번풍 등을 탄핵하려 했으나, 번풍 등은 오히려 양진을 모함했고, 안제는 양진을 태위에서 면직시켰다.[1]

양진은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낙양성 서쪽에 있는 '''석양정'''에서 독약을 마시고 "내 일은 끝났다!"라고 외치며 71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2. 1. 출생과 가계

선조는 전한 초기 적천후(赤泉侯) 양희이다. 증조부는 안평후(安平侯) 양창(사마천의 사위, 소제 때의 승상)이다. 아버지는 '함환(銜環)' 고사로 유명한 양보이다. 양진은 "'''사세태위(四世太尉), 덕업상계'''"의 첫 번째 인물이다.

2. 2. 학문과 초기 관직 생활

양진은 어려서 태상(太常) 환욱에게서 《구양상서(歐陽尙書)》를 배웠으며, 경전에 밝아 관서(關西)의 공자로 칭송받았다. 주와 군의 초빙을 계속 거절하고 벼슬하지 않으며 농사를 지어 생활하며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했고, 제자들의 도움도 거절했다.

50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주와 군에서 벼슬을 시작했다. 대장군 등질은 양진의 평판을 듣고 무재로 추천했다. 양진은 4번 관직을 옮겨 형주자사(荊州刺史)·동래태수(東萊太守)를 역임했다. 동래태수 부임 중, 형주자사 시절에 무재로 추천했던 왕밀(王密)이 황금을 주며 사례하려 하자,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안다(天知, 神知, 我知, 子知)"는 '사지(四知)'를 말하며 거절했다. 동래태수에서 탁군태수(涿郡太守)로 전직되었을 때에도 청렴한 자세를 관철했다.

2. 3. 중앙 관직과 간언

원초 4년(117년), 중앙으로 소환되어 태복이 되었고, 후에 태상이 되었다. 유학자의 인재가 부족했기에 진류의 명사 양륜 등을 추천하여 박사의 자질을 일신시켰다.

영녕 원년(120년) 사도가 되었다. 영녕 2년(121년), 태후 등수가 사망하고, 등씨 일족이 숙청되어 안제의 친정이 시작되자 안제의 측근들이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안제의 유모 왕성의 딸 백영이 궁중에서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양진은 안제에게 간신 제거를 권했다. 안제는 양진의 상주문을 측근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양진은 원망을 사게 되었다.

백영이 유씨 황족과 결혼하여 더욱 세도를 부리자, 양진은 다시 상소하여 견제했지만, 안제는 묵살했다.

연광 2년(123년), 양진은 태위가 되었다. 대홍려 경보(유경의 정실 부인 경희의 형)는 양진에게 중상시 이윤의 형을 임용하도록 권했지만, 양진은 거절했다. 경보는 양진을 설득하려 했지만, 양진은 정론을 펼치며 당당하게 거절했기 때문에 경보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집금오 염현도 연줄을 통해 인재 발탁을 양진에게 요청했지만, 양진은 거절했다. 사공 유수가 이 이야기를 듣고, 즉시 이윤의 형과 염현의 연줄을 임용했기 때문에 양진은 더욱 원망을 받게 되었다.

안제는 왕성 모친을 위해 저택을 건설했고, 환관 중상시 번풍, 강경, 이윤, 유안, 진달시중 주광, 사혼 등이 조정과 궁중에서 암약하는 등 안제의 측근들의 기세는 더욱 거세졌다. 양진은 여러 차례 강한 어조로 안제를 간했기 때문에 안제도 양진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2. 4. 모함과 자결

연광 3년(124년), 안제가 동쪽으로 순행(巡幸)을 간 사이, 번풍 등은 조서를 위조하여 저택을 대대적으로 증축했다.[1] 양진의 연인(戀人) 고서가 이를 간파하고 번풍 등을 탄핵하려 했으나, 번풍 등은 도리어 양진을 참소했고, 안제는 양진을 태위에서 면직시켰다.

양진은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낙양성 서쪽에 있는 '''석양정'''에서 독약을 마시고 "내 일은 끝났다!"라고 외치며 71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2. 5. 사후

순제 즉위 후 번풍 등은 주살되었고, 양진의 제자 우방, 진익의 노력으로 양진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아들들도 관직을 받았으며, 개장 직전 무덤에 큰 새가 나타났다고 한다.

3. 가계

양진의 가계도

4. 후손

양진의 가문은 "사세삼공(四世三公)"으로 불리며, 양진, 양병(양진의 셋째 아들), 양사, 양표 4대에 걸쳐 재상(宰相)을 배출했다.[2] 양진의 후손들은 조위에서는 냉대받았으나, 서진 이후 북조의 여러 왕조에서 , 에 이르기까지 고관을 배출했다.[2]

를 건국한 양견은 양진을 시조라고 칭했다. 그러나 역사학자 타니카와 미치오는 수나라 황실 양씨가 한대(漢代) 명문 홍농 양씨 출신이라는 주장의 진위 여부는 불확실하다고 언급했다.

5. 명언

이전에 양진에 의해 승진한 왕밀(王密)이라는 자가 양진에게 사례를 하려고 밤중에 황금을 가져왔다. 양진은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안다."[3]사지(四知)를 말하며 이를 거절했다. 둘만의 비밀이라고 해도, 이미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자신이 알고, 상대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참조

[1] 문서 "「天知る、地知る、汝知る、我知る」'''の'''「四知」'''の故事が生まれた"
[2] 간행물 隋代弘農楊氏の研究 : 隋唐政権形成期の「門閥」 https://hdl.handle.n[...] 学習院大学東洋文化研究所 2017-03
[3] 문서 近代日本の小学校教科書における中国人像 http://www3.grips.ac[...] 政策研究大学院大学 20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